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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다녀왔습니다./2011년 여름휴가

백담사




백담사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불교에서, 일정한 교구의 본사(本寺)에 딸린 작은 절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절의 기원은 647년(진덕여왕 1)에 자장(慈藏)이 창건한 한계사(寒溪寺)입니다. 690년(신문왕 1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했습니다. 785년(원성왕 1) 다시 불탄 것을 790년에 종연(宗演)·광학(廣學)·각조(覺照)·영희(靈熙)·법찰(法察)·설흡(雪洽) 등이 절터에서 30리 아래로 옮겨 운흥사(雲興寺)라고 했습니다. 984년(성종 3)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자 987년에 동훈(洞薰)·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의 북쪽 60리 되는 곳에 옮겨짓고 심원사(深源寺)라고 개칭했습니다. 1432년(세종 14)에 또다시 불이 나자 의준(儀俊)·해섬(海暹)·취웅(翠雄)·신열(愼悅) 등이 옮겨 짓고 선구사(旋龜寺)라 개칭했습니다. 1443년 화재로 소실되자 1447년 옛 터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절을 짓고 영취사(靈鷲寺)라고 했습니다.

1455년(세조 1)에 다시 화재로 불타버리자 재익(載益)·재화(載和)·신열 등이 옛 터의 상류 20리 되는 곳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명했습니다. 1775년(영조 51)에 다시 불이 나자 최붕(最鵬)이 태현(太賢)·태수(太守)와 함께 중건하고, 심원사(尋源寺)라고 개칭했으나 1783년(정조 7)에 다시 백담사로 환원했습니다. 1915년에 일어난 화재로 거의 모든 당우가 타버린 것을 당시 주지였던 인공(印空)이 중건에 착수해 1921년에는 응향각 등 사무실 30여 칸을 새로이 짓고, 종과 북을 주조해 낙성법회를 열었습니다.

근대에 한용운이 머물면서 〈님의 침묵〉, 〈불교유신론 佛敎維新論〉을 집필하는 등 만해사상의 산실이 되었습니다. 6·25전쟁 때 불탄 것을 1957년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88년 11월 23일 전두환 전(前)대통령 내외가 대(對) 국민사과성명 발표 후 이 절에 은거했다가 1990년 12월 30일에 연희동 사저로 돌아가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칠성각·선원(禪院)·요사채 등이 있고, 남쪽으로 150m 떨어진 곳에 관음전이 있습니다. 그밖에 자장의 유물로 전하는 아미타상과 소종(小鐘), 인조(仁祖)의 하사품인 옥탑(玉塔), 설담당(雪潭堂) 부도, 연포당(蓮浦堂) 부도 등이 있습니다.




신흥사의 말사라고 하는데 그 규모가 신흥사와 맘먹을 정도로 크고 절 앞에는 큰 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용운



한용운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주 출신입니다. 그의 유년시절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어릴 때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고, 18세 때인 1896(또는 1897)년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수년 간 불교서적을 읽었다고 합니다. 출가의 원인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당시 고향 홍성군 홍주에서도 갑오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이 전개된 것으로 미루어 역사적 격변기의 상황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으로 백담사가 유명해졌다고 하는데 정작 이곳을 구경하는 이는 거의 없고 백담사 앞 천에서 노는 이만 많았습니다. 전두환 대통령도 풍광 때문에 오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백담사를 다 둘러보고 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들.
백담사는 백담사 입구쪽에 차를 주차하고 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주차비는 소형차 4,000원이고 마을 버스 요금은 편도 대인 2,000원 왕복 4,000원입니다.

백담사까지 거리가 꽤 있어서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없고 개인차량은 진입이 불가하게 되어 있습니다. 백담사로 진입하는 길의 폭이 좁아 중간 중간에 차량 교차지점 빼고는 일방통행만이 가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