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책을 읽었습니다./인문

뜻으로 본 한국역사



이책을 읽으면서 기존에 알고 있던 역사를 보는 시각에 많이 벗어날 수 있었다. 이책의 제목에 있는 "뜻"은 "시각"일 것이다. 어떠한 "시각"으로 역사를 바라보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해석되어지는 것이고 살아날 수도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재에 의하여 글로 뜻으로 살아나야 역사는 존재하는 것이고 그 역사가 지금의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 사실을 바라보는 역사가 아닌 뜻에 의하여 바라보는 역사를 이야기하고 그런 역사의 큰 물줄기에 현대의 우리가 무슨 사명으로 살아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 한다.

책을 읽으면서 자칫 어용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들고 또 국수주의로 빠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과연 내것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아무튼 내것에 대한 고민과 현대에 내가 어떠한 위치에 어떻게 서 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해주는 좋은 책인 것 같다.

다만 역사 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는 것은 조금 조심스럽지 않을까 생각한다.

뜻으로본한국역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 한국사 > 한국통사
지은이 함석헌 (한길사, 2006년)
상세보기



요즘 한국의 지식인들에 대하여 관심이 부쩍 많아지고 있는데 함석헌 선생님의 약력을 옮겨 본다.

생애 초기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출생했다. 1917년에 황득순과 결혼하고, 1919년 평양 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에 숭실학교 교사로 있었던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3.1운동에 참가한 후,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되어 2년간 학업을 중단한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게 된다.

[편집] 청소년기

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김교신,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1928년 졸업과 동시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1934~5년에 동인지 《성서조선》에서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한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1]

《성서조선》 창간호 멤버. 뒷줄 오른쪽이 함석헌.

1942년 5월 《성서조선》(聖書朝鮮) 제 158호(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

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평하였다.[2][3]

[편집] 광복 이후 활동

[편집] 정부 수립 이후

해방 후에는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북조선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탈출,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월남하였다. 북조선 탈출 전 그는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4] 이후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다 1956년부터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1961년 장면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

[편집] 반독재 민주화 운동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 독재정권 시절부터 반독재 야당 운동에 참여하여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1970년에는 진보적 평론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기도 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5]

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1980년 1월 YWCA 위장 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1980년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1980년 신군부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

[편집] 생애 후반

제5공화국을 거치면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그는 두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자로 선정되었으며, 성서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각 고전를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여,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 비폭력주의 신조로 말미암아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사회 평론뿐만 아니라 《도덕경》 등의 각종 동양 고전 주해도 행하였고, 그리고 시를 창작하기도 했다. 1989년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입원, 그해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하였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87세였다.

[편집] 사후

장지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간파리의 야산에 매장되었다가,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 수훈 이후 묘소가 대전 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6]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일대기로 《내가 본 함석헌》, 《함석헌 평전》이 있다.